Tourist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Life + Live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그대로부터
가장 먼 곳의 풍경들

잘 다져놓은 신작로처럼, 넓은 대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어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건물만이 마치 신전에 바친 꽃다발처럼 광활한 대지를 수놓았죠. 비행기도 석양과 함께 그렇게 몸을 낮춰 갔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국제공항, 한국과의 시차는 정확히 12시간. 한국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면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죠. 그대로부터 가장 먼 곳의 여정,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어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아르헨티나.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여행 아닌가요.

글·사진 김동우(여행 칼럼니스트)

스위스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바릴로체 전경

Tourist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Life + Live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그대로부터
가장 먼 곳의 풍경들

잘 다져놓은 신작로처럼, 넓은 대지가 지평선까지 펼쳐져 있었어요. 인간이 만들어 놓은 건물만이 마치 신전에 바친 꽃다발처럼 광활한 대지를 수놓았죠. 비행기도 석양과 함께 그렇게 몸을 낮춰 갔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국제공항, 한국과의 시차는 정확히 12시간. 한국에서 땅을 파고 들어가면 지구 반대편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는 곳이죠. 그대로부터 가장 먼 곳의 여정, 가슴은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어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들,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아르헨티나. 상상만으로도 짜릿한 여행 아닌가요.

글·사진 김동우(여행 칼럼니스트)

스위스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바릴로체 전경

Dear. 한라인

공항을 빠져나온 버스가 도심으로 들어섰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 야경은
휘핑크림을 듬뿍 올린 카페모카처럼 달콤했죠.
차가운 공기가 전해주는 촉감은
한국 늦가을처럼 고즈넉했고,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따스했어요.
한산한 거리 어디쯤에서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고 있을 것만 같은 거리.
밤거리처럼 짙은 빛깔의 와인과
땅고가 있는 나라 아르헨티나 여정은
그렇게 잔잔하게 시작됐어요.
한라인, 그대로부터
가장 먼 아르헨티나로 같이 떠나 봐요.


From. 김동우

사람보다 소가 많은 나라
사실 전 ‘도시 불감증’ 여행자에요. 그런 저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완벽한 여행의 변주였어요. 마치 방향을 알 수 없는 숲을 헤매다 ‘스머프 마을’을 만난 듯 한 느낌이었죠. 와인과 소고기, 음악과 춤이 한 데 어우러진 최고의 도시가 여기더라고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에요.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죠.
슈퍼에 들어가 와인 가격을 보곤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어요. 한국에서 2~3만 원 짜리 와인이 글쎄 우리 돈 몇 천 원밖에 안하더군요. 왜 아니겠어요.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와인 생산국이에요. 특히 멘도사에서 생산하는 말벡Malbec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품종이죠.
여기선 몇 천 원짜리 와인이라고 쉽게 보면 안 돼요.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마시는 와인과 똑같은 와인이니까요. 여행 처음부터 와인하면 칠레만 생각하고 있던 상식이 단박에 무너지더군요.
하나 더 놀라웠던 건 붉은 레드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고기 가격이었어요. 놀라지 마세요. 아르헨티나는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이 사는 나라에요. 과거에는 인구의 4배에 달하는 소가 드넓은 초원을 채우고 있었는데 지금도 국민 1인당 2마리의 소가 풀밭을 어슬렁거린다고 해요. 마트에 가서 소고기 가격을 보니까 꽃등심 600g이 우리 돈 만 원이 채 안 됐어요. 놀라움 그 자체죠. 그런데 으레 우리가 먹던 마블링 끼어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더군요. 아르헨티나에서는 소들을 전부 방목하기 때문에 마블링이 끼질 않아요.
조금 슬픈 이야기는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사람이 즐겨 먹는 해산물 시장은 초라하기 짝이 없죠.

(좌)01.
194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 조형물.
‘에비타'(Evita)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국민 영웅이란 평가와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단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우)02.
아르헨티나 땅고의 발생지 ‘라 보카’는 형형색색 페인트로 칠한 집들이 인상적인 공간이다.
과거 배에 칠하고 남은 페인트를 가지고 조금씩 색을 입힌 것에서 시작된 풍경이다.

03.
엘 아테네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배경
아르헨티나 역사 이야기를 조금 해볼게요. 1998년 한국에 IMF(국제통화기금) 경제 위기가 밀어닥쳤을 때 국민 모두가 국가부도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죠. 반면 아르헨티나는 지금까지 IMF에 손을 벌린 일이 수차례나 된다고 해요. 심지어 지급유예를 선언한 적도 있답니다.
그런데 혹시 20세기 초까지 아르헨티나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던 거 아세요? 소고기 수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프랑스ㆍ독일과 비슷한 수준으로 국력을 끌어올렸어요. 이탈리아ㆍ스페인보다도 훨씬 잘 살았죠. 한때는 경제 순위 10위에 오른 적도 있었어요.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마르코(주인공)의 엄마가 아르헨티나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장면은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주죠.
건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로(왕복 16차선, 폭 144미터)였다는 ‘7월 9일 거리’Avenida 9 de Julio에서 찬란했던 아르헨티나의 과거를 읽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이 길에는 에바 페론의 대형 상징물과 부에노스아이레스 건립 400주년을 기념해 1936년 세워진 높이 72미터의 오벨리스꼬Obelisco가 자리하고 있어요. 7월 9일 거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남미의 파리로 불리던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얼마나 화려한 도시였는지 짐작되죠. 그랬던 나라는 포퓰리즘정책 등이 난무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 가기 시작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보고, 먹고,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은 나라에요. 한정된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중에서 한 서점을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죠. 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엘 아테네오El Ateneo라는 곳인데요, 여긴 원래 1912년 문을 연 1,050석 규모의 오페라 극장이었어요. 한때는 땅고의 대부 까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 공연을 했
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죠. 그러나 엘 아테네오는 부침을 거듭하며 지난 2000년 경영 위기로 문을 닫게 돼요. 그런데 마침 한 출판사가 이곳을 임대하면서 3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죠. 유명 배우가 유려한 몸짓으로 수놓던 무대는 멋진 카페로 바뀌었고, 서점 곳곳에 남아 있는 공연장의 아름다운 장식은 책을 더 빛나게 하고 있어요. 황금빛 치장을 한 서점 내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죠. 세기의 명작도 이곳에선 숨을 죽일 것만 같은 분위기에요.
양쪽으로 휘장이 쳐진 무대에 올라 봤어요. 서점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말벡 한 잔을 주문했죠. 붉은 와인이 화려한 조명을 받아 보랏빛으로 변하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서 맛보는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 같았어요.

04.
밀롱가에서 땅고를 춰보는 경험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에서 꼭 해봐야 할 것 중 하나다.

밀롱가에서 즐기는 땅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땅거미가 짙어지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탱고, 즉 땅고를 즐기러 가봐야죠. ‘땅고’란 단어는 ‘가까이 다가서다’, ‘만지다’, ‘마음을 움직이다’란 라틴어가 어원이에요.
땅고는 유럽 등지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로 이주한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음악에서 시작됐죠. 아프리카 노예의 춤 칸돔베, 쿠바 선원의 무곡 아바네라,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플라야다스가 섞이면서 탄생했다는 게 정설이에요.
땅고 음악은 보통 바이올린 두 대 그리고 피아노, 더블베이스, 반도네온 등의 협주로 이뤄지죠. 땅고의 춤사위는 항구 도시 라 보까la Boca에서 일하던 선원들의 춤이 원류인데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의 부흥기와 함께 유럽과 북미지역으로 퍼져 나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돼요. 그러다 아르헨티나로 역수출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죠. 땅고 발생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래된 항구 라 보까라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발생지를 두고 아직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어요. 땅고는 유네스코 무형문화 재로 지정돼 있기도 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땅고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추천하고 싶은 건 현지인들이 퇴근 후에 편하게 와서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곳들이에요.
밀롱가Milonga라고 부르는 곳인데요, 처음에는 반짝이 옷차림을 한 무희들이 춤추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제가 찾아간 곳은 꾸미지 않은 일상복 차림의 남녀가 복고풍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장면이 펼쳐지는 곳이었어요. 20대 청년에서부터 60대 장년까지 연령대도 다양해요. 남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춤답게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땅고는 마음으로 추는 춤’이란 말이 실감 나죠.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움을 찾아
아르헨티나가 매력적인 이유는 유서 깊은 역사, 문화와 더불어 마치 알프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림같은 자연환경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에요. 흔히 파타고니아라 부르는 남부 지방은 살아 있는 자연을 만날 수 있는 보석 같은 곳이죠.
스위스 이민자들이 세운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San Carlos de Bariloche부터 남쪽 끝 우수아이아까지를 흔히 파타고니아 지방이라고 해요. 파타고니아란 명칭은 마
젤란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한 원주민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란 말에서 왔어요. 당시 스페인 사람들 평균 키가 155센티미터 정도였는데, 파타곤은 무려 180센티미터였다고 하니, 명칭의 유래가 이해가 되죠.
파타고니아의 대명사는 바람이에요. 최대 풍속이 초속 60미터를 넘는 일도 많아요. 보통 초속 40미터가 넘으면 사람이 날아간다고 하죠. 이 때문에 파타고니아는 ‘폭풍우의 지대’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해요.
파타고니아 최고의 여행지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에요. 모레노 빙하는 지구 온난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최대 2미터까지 몸집을 키워가는 중이래요. 여기다 빙하 위를 걸을 수 있는 코스가 갖춰져 있어 여행자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죠.

(좌)05.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만들어 낸 빙하가 녹아 신비로운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우)06.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모레노 빙하에선 빙하 위를 걸어 볼 수 있는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처음 모레노 빙하를 본 순간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빙하가 희미하게 보이는 옅은 숲길을 나오면 머리 위로 아르헨티나 국기가 나부끼는데 그 너머로 하늘색 빛을 띠고 있는 어마어마한 덩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설산의 곱고 새하얀 빛깔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빙하의 영롱한 비취색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죠. 마치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만 같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빙하는 산을 넘던 수증기가 얼면서 만들어진다고 해요.
이런 빙하를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가이드를 따라 빙하 트레킹에 나섰어요. 빙하 위를 ‘뽀드득, 뽀드득’ 걷다 작은 빙수가 담긴 웅덩이를 만났어요. 하늘색 빙수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혔죠. 빙수가 내 몸속을 푸른빛으로 물들일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셀 수 없는 시간이 몸속으로 들어와 서서히 열기를 식혀주었어요. 왠지 시간을 마시는 듯한 참 묘한 느낌….
아르헨티나, 그대로부터 가장 먼 곳의 풍경에는 거부 할 수 없는 매혹이 담겨 있어요.
생애 마지막 여행지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을 만큼 말이죠.

Travel Tip
아르헨티나는 은행보다 사설 환전소 환율이 높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하듯 무작정 은행에서 환전하는 건 피해야 할 일이에요. 사설 환전소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위폐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택시를 타고 내릴 때도 가급적이면 큰돈을 내는 건 피해야합니다. 거스름돈에 위폐를 끼워 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Dear. 한라인

공항을 빠져나온 버스가 도심으로 들어섰어요.
부에노스아이레스 야경은
휘핑크림을 듬뿍 올린 카페모카처럼 달콤했죠.
차가운 공기가 전해주는 촉감은
한국 늦가을처럼 고즈넉했고,
고풍스러운 건물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따스했어요.
한산한 거리 어디쯤에서 감미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고 있을 것만 같은 거리.
밤거리처럼 짙은 빛깔의 와인과
땅고가 있는 나라 아르헨티나 여정은
그렇게 잔잔하게 시작됐어요.
한라인, 그대로부터
가장 먼 아르헨티나로 같이 떠나 봐요.


From. 김동우

사람보다 소가 많은 나라
사실 전 ‘도시 불감증’ 여행자에요. 그런 저에게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완벽한 여행의 변주였어요. 마치 방향을 알 수 없는 숲을 헤매다 ‘스머프 마을’을 만난 듯 한 느낌이었죠. 와인과 소고기, 음악과 춤이 한 데 어우러진 최고의 도시가 여기더라고요.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아르헨티나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도시에요.
이런 곳이 있었나 할 정도로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죠.
슈퍼에 들어가 와인 가격을 보곤 그만 비명을 지를 뻔했어요. 한국에서 2~3만 원 짜리 와인이 글쎄 우리 돈 몇 천 원밖에 안하더군요. 왜 아니겠어요. 아르헨티나는 세계적인 와인 생산국이에요. 특히 멘도사에서 생산하는 말벡Malbec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품종이죠.
여기선 몇 천 원짜리 와인이라고 쉽게 보면 안 돼요.
우리가 비싼 돈을 주고 마시는 와인과 똑같은 와인이니까요. 여행 처음부터 와인하면 칠레만 생각하고 있던 상식이 단박에 무너지더군요.
하나 더 놀라웠던 건 붉은 레드 와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소고기 가격이었어요. 놀라지 마세요. 아르헨티나는 사람보다 소가 더 많이 사는 나라에요. 과거에는 인구의 4배에 달하는 소가 드넓은 초원을 채우고 있었는데 지금도 국민 1인당 2마리의 소가 풀밭을 어슬렁거린다고 해요. 마트에 가서 소고기 가격을 보니까 꽃등심 600g이 우리 돈 만 원이 채 안 됐어요. 놀라움 그 자체죠. 그런데 으레 우리가 먹던 마블링 끼어 있는 그런 모습이 아니더군요. 아르헨티나에서는 소들을 전부 방목하기 때문에 마블링이 끼질 않아요.
조금 슬픈 이야기는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한국 사람이 즐겨 먹는 해산물 시장은 초라하기 짝이 없죠.

(좌)01.
1940년대 중반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 조형물.
‘에비타'(Evita)란 애칭으로 불리기도 하는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국민 영웅이란 평가와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단 상반된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우)02.
아르헨티나 땅고의 발생지 ‘라 보카’는 형형색색 페인트로 칠한 집들이 인상적인 공간이다.
과거 배에 칠하고 남은 페인트를 가지고 조금씩 색을 입힌 것에서 시작된 풍경이다.

03.
엘 아테네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엄마 찾아 삼만리의 배경
아르헨티나 역사 이야기를 조금 해볼게요. 1998년 한국에 IMF(국제통화기금) 경제 위기가 밀어닥쳤을 때 국민 모두가 국가부도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죠. 반면 아르헨티나는 지금까지 IMF에 손을 벌린 일이 수차례나 된다고 해요. 심지어 지급유예를 선언한 적도 있답니다.
그런데 혹시 20세기 초까지 아르헨티나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던 거 아세요? 소고기 수출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프랑스ㆍ독일과 비슷한 수준으로 국력을 끌어올렸어요. 이탈리아ㆍ스페인보다도 훨씬 잘 살았죠. 한때는 경제 순위 10위에 오른 적도 있었어요.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에서 마르코(주인공)의 엄마가 아르헨티나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나는 장면은 당시 상황을 잘 보여 주죠.
건설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로(왕복 16차선, 폭 144미터)였다는 ‘7월 9일 거리’Avenida 9 de Julio에서 찬란했던 아르헨티나의 과거를 읽어 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이 길에는 에바 페론의 대형 상징물과 부에노스아이레스 건립 400주년을 기념해 1936년 세워진 높이 72미터의 오벨리스꼬Obelisco가 자리하고 있어요. 7월 9일 거리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남미의 파리로 불리던 시절,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얼마나 화려한 도시였는지 짐작되죠. 그랬던 나라는 포퓰리즘정책 등이 난무하면서 점점 힘을 잃어 가기 시작해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부에노스아이레스는 보고, 먹고, 체험할 수 있는 것들이 참 많은 나라에요. 한정된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그중에서 한 서점을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했죠. 혹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라고 들어 보셨나요.
엘 아테네오El Ateneo라는 곳인데요, 여긴 원래 1912년 문을 연 1,050석 규모의 오페라 극장이었어요. 한때는 땅고의 대부 까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이 공연을 했
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죠. 그러나 엘 아테네오는 부침을 거듭하며 지난 2000년 경영 위기로 문을 닫게 돼요. 그런데 마침 한 출판사가 이곳을 임대하면서 35만 권의 장서를 보유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죠. 유명 배우가 유려한 몸짓으로 수놓던 무대는 멋진 카페로 바뀌었고, 서점 곳곳에 남아 있는 공연장의 아름다운 장식은 책을 더 빛나게 하고 있어요. 황금빛 치장을 한 서점 내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죠. 세기의 명작도 이곳에선 숨을 죽일 것만 같은 분위기에요.
양쪽으로 휘장이 쳐진 무대에 올라 봤어요. 서점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말벡 한 잔을 주문했죠. 붉은 와인이 화려한 조명을 받아 보랏빛으로 변하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에서 맛보는 와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 같았어요.

04.
밀롱가에서 땅고를 춰보는 경험은 부에노스아이레스 여행에서 꼭 해봐야 할 것 중 하나다.

밀롱가에서 즐기는 땅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땅거미가 짙어지면 가야 할 곳이 있어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탱고, 즉 땅고를 즐기러 가봐야죠. ‘땅고’란 단어는 ‘가까이 다가서다’, ‘만지다’, ‘마음을 움직이다’란 라틴어가 어원이에요.
땅고는 유럽 등지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로 이주한 노동자들이 만들어 낸 음악에서 시작됐죠. 아프리카 노예의 춤 칸돔베, 쿠바 선원의 무곡 아바네라, 아르헨티나 목동의 노래 플라야다스가 섞이면서 탄생했다는 게 정설이에요.
땅고 음악은 보통 바이올린 두 대 그리고 피아노, 더블베이스, 반도네온 등의 협주로 이뤄지죠. 땅고의 춤사위는 항구 도시 라 보까la Boca에서 일하던 선원들의 춤이 원류인데 20세기 초반 아르헨티나의 부흥기와 함께 유럽과 북미지역으로 퍼져 나가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돼요. 그러다 아르헨티나로 역수출되면서 현재 모습을 갖추게 됐죠. 땅고 발생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오래된 항구 라 보까라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가 발생지를 두고 아직도 싸움을 계속하고 있어요. 땅고는 유네스코 무형문화 재로 지정돼 있기도 해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땅고를 보는 일은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제가 추천하고 싶은 건 현지인들이 퇴근 후에 편하게 와서 음악을 듣고 춤을 추는 곳들이에요.
밀롱가Milonga라고 부르는 곳인데요, 처음에는 반짝이 옷차림을 한 무희들이 춤추는 곳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실상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제가 찾아간 곳은 꾸미지 않은 일상복 차림의 남녀가 복고풍 음악에 맞춰 스텝을 밟고 있는 지극히 평범한 장면이 펼쳐지는 곳이었어요. 20대 청년에서부터 60대 장년까지 연령대도 다양해요. 남의 시선 따위는 의식하지 않고 춤을 춤답게 즐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땅고는 마음으로 추는 춤’이란 말이 실감 나죠.

파타고니아의 아름다움을 찾아
아르헨티나가 매력적인 이유는 유서 깊은 역사, 문화와 더불어 마치 알프스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림같은 자연환경까지 갖추고 있기 때문이에요. 흔히 파타고니아라 부르는 남부 지방은 살아 있는 자연을 만날 수 있는 보석 같은 곳이죠.
스위스 이민자들이 세운 ‘산 카를로스 데 바릴로체’San Carlos de Bariloche부터 남쪽 끝 우수아이아까지를 흔히 파타고니아 지방이라고 해요. 파타고니아란 명칭은 마
젤란 원정대가 거인족이라고 묘사한 원주민을 가리키는 ‘파타곤’patagón이란 말에서 왔어요. 당시 스페인 사람들 평균 키가 155센티미터 정도였는데, 파타곤은 무려 180센티미터였다고 하니, 명칭의 유래가 이해가 되죠.
파타고니아의 대명사는 바람이에요. 최대 풍속이 초속 60미터를 넘는 일도 많아요. 보통 초속 40미터가 넘으면 사람이 날아간다고 하죠. 이 때문에 파타고니아는 ‘폭풍우의 지대’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해요.
파타고니아 최고의 여행지는 페리토 모레노 빙하Perito Moreno Glacier에요. 모레노 빙하는 지구 온난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최대 2미터까지 몸집을 키워가는 중이래요. 여기다 빙하 위를 걸을 수 있는 코스가 갖춰져 있어 여행자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죠.

(좌)05.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만들어 낸 빙하가 녹아 신비로운 푸른 빛을 띠고 있다.
(우)06.
파타고니아 지방에 있는 모레노 빙하에선 빙하 위를 걸어 볼 수 있는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처음 모레노 빙하를 본 순간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빙하가 희미하게 보이는 옅은 숲길을 나오면 머리 위로 아르헨티나 국기가 나부끼는데 그 너머로 하늘색 빛을 띠고 있는 어마어마한 덩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어요. 설산의 곱고 새하얀 빛깔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빙하의 영롱한 비취색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이었죠. 마치 하늘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만 같았어요. 아니나 다를까 빙하는 산을 넘던 수증기가 얼면서 만들어진다고 해요.
이런 빙하를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요. 가이드를 따라 빙하 트레킹에 나섰어요. 빙하 위를 ‘뽀드득, 뽀드득’ 걷다 작은 빙수가 담긴 웅덩이를 만났어요. 하늘색 빙수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식혔죠. 빙수가 내 몸속을 푸른빛으로 물들일 것만 같았어요. 그렇게 셀 수 없는 시간이 몸속으로 들어와 서서히 열기를 식혀주었어요. 왠지 시간을 마시는 듯한 참 묘한 느낌….
아르헨티나, 그대로부터 가장 먼 곳의 풍경에는 거부 할 수 없는 매혹이 담겨 있어요.
생애 마지막 여행지를 선택하라면 주저 없이 지구 반대편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끊을 만큼 말이죠.

Travel Tip
아르헨티나는 은행보다 사설 환전소 환율이 높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하듯 무작정 은행에서 환전하는 건 피해야 할 일이에요. 사설 환전소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위폐가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택시를 타고 내릴 때도 가급적이면 큰돈을 내는 건 피해야합니다. 거스름돈에 위폐를 끼워 주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2019-11-05T15:42:47+09:00